천주교 민낯 ‘3.1운동’은 금지 ‘신사참배’엔 적극… 정권엔 머리 숙여
2000년대 중반 들어서 한국천주교회가 국가권력의 독선적인 정책추진과정을 비판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요구에 부응한 결과 한국사회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천주교 성장의 이면에는 국가권력과의 유착 속에서 이뤄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천주교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방조 부역하고, 신사참배에도 적극적이었다. 교회 지도자들도 친일적인 성향이 강했다.
실제 천주교가 일제 강점기 자국민을 외면하고 일본 신에게 절했다는 사실은 천주교사(史)의 암울한 진실이다.
◆한국천주교회 주교, 3.1운동 참여 금지시켜
일제 강점기 가톨릭은 한국이나 일본의 정치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견지했다.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는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교회의 임무와 배치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899년 조선 정부와 ‘교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됐다. 조선 정부와 천주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을 문언으로 규정했다. 천주교회는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며 정부는 교회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약은 1904년 ‘선교조약’에서 확인됐다.
하지만 일제하의 정교분리 원칙은 정교 유착의 성격이 강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일제의 식민지 지배 통치를 방조, 비호하는 정도를 넘어 동조와 충성을 서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천주교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서구권 제국주의 국가 출신의 선교사들이 지도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만세운동 참가를 일절 금지시켰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던 경성교구장(현 서울교구)과 대구교구장은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한국 천주교회는 이들 두 교구장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일부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3·1운동에 참여했지만 두 주교는 한결같이 3·1운동을 단죄했다. 이들은 3·1운동에 천주교회가 참여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고, 신학생들이 운동에 가담하자 주동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징계 조처로 휴교령까지 내렸다.
또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 서명을 위해 천도교 제3대 교주였던 손병희가 각 종단 종교계 유지들과 접촉해 민족대표를 꾸렸을 때도 천주교는 참여하지 않았다.
2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3.1운동 100주년의 성찰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은 “천주교가 일제 강점기 때 대다수 민중의 요구였던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의 공론장에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조선 천주교회가 독립운동을 포함한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 때문”이라며 “당시 조선 천주교를 주도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보수적 선교정책에 원인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주교를 정점으로 조직된 천주교의 중앙집권적 위계 구조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57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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